가명을 사용한 묵시문학의 저자
주전 2세기부터 주후 2세기 사이에 주로 나타났던 묵시문학은 일반적으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세계의 운명을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 간의 투쟁으로 표현하는 묵시문학은 예언서와는 달리 저자의 실제적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의 유명한 신앙적 영웅들의 이름을 빌려서 사용한다. 이러한 가명(pseudonymity)의 사용은 묵시문학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아담, 아브라함, 에녹, 엘리야, 에스라 등이 묵시문학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니엘도 역시 고대의 유명한 영웅의 이름이든지 이스라엘에 매우 잘 알려진 현자의 이름과 관련되고 있다. 묵시문학의 저자는 이러한 유명한 신앙의 위인들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들로 고대의 유명한 신앙인들의 이름을 빌어 계시를 받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에는 안티오코스 세 시대에 살았던 한 가상의 저자가 숨어 있다. 이름을 빌려 쓰는 형식은 옛 정신을 받고 있는 인물들을 인용 함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들은 역사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명의 사용은 헬라의 지혜문학과 관련된 가명으로 책을 저술하는 행위는 헬라 시대에 널리 유행 되던 문학적 관습이었다. 헬라의 많은 작품들은 책의 저자를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연금술사” (Hermetic) 와 “오르페우스”(Orphic TeÀ’1) 등이 바로 그러한 작품들이다.
기원전 2-3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도공의 신탁”(The Oracle of the Potter) 에 나오는 주인공은 약 1000년 전의 시대인 아메노피스 3세 (Amenopis III, 기원전 3- 1377 년) 때에 살았던 현인이다. 다니엘서가 과거 위대한 현인의 이름을 빌려 쓰고 있는 것은 책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헬레니즘이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지역 그리고 인도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과 깊이 관련된다. 이 시기에 헬라 사상은 매우 광활한 지역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묵시문학이 국제적인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책을 기록하게 된 이유
첫째, 스가랴와 말라기 이후에 구약성서의 예언정신이 완전히 소진되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고 헬라의 영향력이 팽배해 질 무렵에 이스라엘 예언자는 더 이상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지 않았다 (집회서 49 :10)은 예언자들의 숫자가 이미 12명(열두 예언서)으로 확정되었다고 전하고 있을 정도다. 유대교의 랍비문서 (Meg . 14a 와 Seder Olam R. 20-21)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숫자를 총 55명 (48 명의 남자 예언자와 익명의 여자 예언자)으로 계산하고 있는데 최후의 예언자가 죽었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 이후부터 약 100여 년 동안(기원전 270-165년) 예언전승의 공백기가 생긴 셈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헬라의 문학 유형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둘째, 현재의 세상 왕국의 종말을 외치는 묵시 문학의 특성 때문에 저자는 자신이 실제적인 이름을 밝히는 것을 회피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매우 위험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해를 받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묵시 문학의 저자들은 왕과 왕국에 저항했던 예언자들이 받았던 비방과 수난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묵시문학이 헬레니즘의 문화적 · 종교적 세계주의에 대항하려는 저항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책의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려고 했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묵시문학 작품의 익명성 또는 가명성은 저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익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며, 유대인들에게 역사와 우주의 개념을 강제로 확대시키고 수정하도록 요구했던 그리스인들의 세계적인 야망에 강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훌륭한 문학적 무기가 되었다.
다니엘서 역시 가명을 사용하여 살아 있는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역사의 주인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분은 세상의 왕을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는 세상의 주인임을 힘차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는 것은 구약성서의 오랜 문학전통 가운데 하나라는 것 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록된 책에 합법성과 권위를 부여하고,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과거의 유명한 신앙적 인물들을 작품의 저자로 소개하였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에서 대부분의 잠언은 솔로몬’의 이름을 빌리고 있으며, 대부분의 시편은 다윗’이라는 이름과 관련시키고 있다.
또한 구약의 율법들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받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구약의 전통은 묵시문학의 저자에게 자신의 이름 대신에 과거의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을 것이다.
출처 : 100주념기념성서주석, 다니엘, 7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