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11-16절 강해 [하루말씀]
[성경말씀]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하루말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에 만난 사람은 걷지 못하여 사람들이 이동시켜 주지 못하면 이동 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율법은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종교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공동체에 있어 아무런 공헌함이 없을 때 이를 불의하게 생각해서 가차 없이 추방하거나 생존권을 박탈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아무런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성령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긍휼함을 베푸시고 걷지 못한 사람을 낫게 하시므로서 이 사람이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내십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도 엄연히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11절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일어서니 솔로몬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몰려들었습니다. 이 솔로몬 행각은 여러 행각들 중에 성전 동쪽에 있던 행각입니다. 성전 동쪽은 이방인들의 뜰과 서기관들이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상인들이 물건을 파고 환전해주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지금 솔로몬 행각에 모인 사람들은 오순절사건에 모여들어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줄곧 거주하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기적을 체험합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치유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오해를 할 까봐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어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걷지 못한 자를 주목하게 하심과 같이 이제 군중이 두 사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이 사람이 낫게 된 것은 우리가 가진 ‘권능’과 ‘능력’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따로 계심을 강조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사람을 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앞서 볼 (14장 8-18절)에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자 군중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각각 헤르메르와 제우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와 그리스의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입니다.
베드로는 이 기적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밝힙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영화롭게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옴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구약에 등장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13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는 모세만에게 쓰였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2장 13절)에 메시야에 대해 이렇게 예언됩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를 통해 베드로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를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했지만 그마저 거부하고 결국 우리를 위해 보내신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15)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바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한 자가 일어난 이유는 16절, 그가 그 이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모든 사람 앞에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가운데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주로 고백하는 감사와 영광의 습관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유익합니다. 하나님이 영광받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나라에 합당하게 쓰임을 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되는 축복된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