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배경59]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본명은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 유대인 역사가이다.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 AD. 12-41) 때인 A.D. 37년에 출생하여 100년경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대의 왕족이며(어머니가 하스모니안 집안) 대제사장 가문으로 19세에 바리새파에 가입했다. A.D. 64년 로마 총독 벨릭스 때 폭동을 일으켜 로마에 끌려간 제사장들을 석방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66년 제1차 유대 전쟁 때 갈릴리 지방의 요타파타(Jotapata) 최고 책임자로서 40명의 지휘관들과 목숨 걸고 성을 지키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67년 7월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와 디도(Titus) 부자에 대항하여 6주 동안 저항하다 죽음을 택하지 않고 투항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 기간 중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의 말이 적중하여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9-79, 재위 69-79)는 네로(Nero)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요세푸스를 2년만에 석방시키고 자신의 가문이 사용하는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씨족 이름)을 하사하며 요세푸스의 후견인이 되었다(69년). 이에 부응하여 요세푸스는 70년에 디도 장군의 통역관이요 조언자로 예루살렘 함락 작전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유다의 마지막 보루였던 마사다 요새를 정복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종전 후 그는 디도 장군과 로마에 입성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고 황제의 옛 저택과 연금, 유대 땅 일부를 하사 받았다. 또한 70년경 첫 아내와 이혼하고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 여성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얻었으며, 75년에는 두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을 통해 두 아들을 낳았다. 이후 그는 작품 활동에 전념했는데, 그가 기록한 “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 : Bellum Judaicum)와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Antiquitates Judaicae)는 유명하다.
75-79년에 아람어로 기록한 전 7권의 “유대 전쟁사”는 B.C. 2세기 중반 이후 유대 역사를 담고 있는데, 예루살렘 함락이나 로마 군대의 전략과 병법 등이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95년경에 헬라어로 기록된 전 20권의 “유대 교대사”는 성경의 천지창조에서부터 유대 반란 이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담고 있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유대교 율법과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유대 전쟁사 부록으로 쓰인 “인생(the Life; Vita)”은 로마에 항복하기 전 갈릴리 사령관으로 있을 때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내용으로, “유대 전쟁사”에 이어 기록되었다. 또 그의 마지막 작품인 두 권으로 된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 Contra Apionem), 97년”은 유대 입장에서 그리스 저자들의 비난ㅇ늘 반박하고(1권), 헬레니즘에 대한 유대교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2권). 그의 작품들은 제롬(Jerome)과 같은 교부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친 로마주의자로서 유대인들에게 반역자로 미움을 받았지만, 유대교를 옹호하고 유대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한 유대인의 변호자였다.
출처 : 성경문화배경사전 (생명의말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