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장 8-13절 하루말씀

창세기 21장 8-13절 하루말씀
창세기 21장 8-13절 하루말씀

창세기 21장 8-13절 하루말씀

[성경말씀]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루말씀]

# 하나님께서는 의심하는 사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18:14절)“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사라를 돌보시고 결국 사라에게 임신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노년에 아들 이삭을 기적적으로 낳았습니다.

*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울상 짓던 사라를 웃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7절에 사라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아브라함에게 가서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일 것이냐고 말하였느냐? 누가 비웃었느냐?”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내게 아들을 낳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또한 젖을 주실 것이다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확신 때문에 사라가 직접 아이에게 젖을 물렸고 8절에,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보통 3살 때까지 젖을 물립니다. 그러므로 이 기적같은 일들이 3년간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젖을 뗄 떼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풉니다. 이 잔치가운데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것입니다.  여기서 놀리다는 표현은 사실 단순한 놀림이 아닙니다. 핍박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사라가 보았을 때 이스마엘과 이삭이 함께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달려갑니다.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고 까지 요구합니다. 이렇게 까지 말하는 이유는 이스마엘의 법적인 상속 권리를 아예 제거시켜서 문제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듣고 매우 큰 근심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스마엘도 자신의 친자식이었기 때문이고
사라의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고민을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12절)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요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이삭에게 주신 약속과 이스마엘에게 주신 약속을 구분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자들을 통해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계보를 따르는 민족이 될 것이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영성의 계보를 따르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갈 4:28-29)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한가지는 하나님나라는 육과 영이 함께 공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그러나 하나님은 영적인 자들 뿐만 아니라 육적인 자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선택받은 사라도 보호해 주시지만 선택받지 못한 하갈도 보호해주시고 쓰임받게 하셨음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마음을 본받고 육적으로만 사는 자들 특별히 우리 주변의 이웃을 내 몸과 사랑하며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