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말씀] 창세기 38장 1-11절 강해
[성경말씀]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하루말씀]
요셉이 은 20개에 팔려 애굽으로 끌려 갔습니다. 이후에 르우벤이 양떼를 돌보다가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형제들과 떨어져 있다가 기회를 봐서 구덩이에 있는 요셉을 구출해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요셉이 구덩이에 없는 것을 보고 극심하게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르우벤은 형제들을 잘 인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와아니, 아나, 아니, 바“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 괴로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르우벤도 다른 형제들의 죄에 동참합니다. 그것은 요셉의 벗겨놓은 옷에다가 숫염소의 피를 적시고 채색옷을 종들에게 먼저 보내어서 긴박성을 알리고 뒤이어 따라가서 아버지께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라고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들들의 이 범죄에 완전히 속아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야곱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요셉의 소식만 듣고 큰낙심을 하고 골방 속에 들어가 후회와 자책감 속에서 매우 괴로운 나날을 보냅니다.
# 요셉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나아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인도하심은 가족과 형제들에게서는 죽은 존재요. 하나님앞에서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별된 존재로써 가족들과 격리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첫번째 사역지가 바로의 신하인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주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노예의 신분으로 시작합니다.
# 그런데 본문은 38장은 유다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이야기를 소개하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 유다의 혈통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죄인입니다. 레아의 넷째아들로 태어나서 형제들과 몹쓸짓을 하고 다닌 죄인입니다. 특별히, 최근에 동생 요셉 죽이는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릴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 유다입니다. 그리고 이 유다의 족보를 보면 죄인들 투성이 입니다. 여인들만 보면, (마 1장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르스와 세라를 낳았다 – 여기서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그러므로 근친상간한 죄를 가지고 있죠. 5절에는 살몬이 기생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이방인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6절에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의 가문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이러한 죄인의 가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은 죄와 상관없는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8장에 요셉의 이야기가 아닌 유다를 기록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사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스리시고 특별히 유다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법으로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지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 1절에 보니,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났다 기록합니다.
이것을 볼때 유다는 자기가 저지른 일로 죄책감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 이방인인 ‘히리’와 가까이 지냅니다. 그런데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보고 함께 동침하며 지냅니다. 특별히 2절에 유다가 수아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했다라는 표현 중에 ‘여기서 보다’라고 하는 단어는 ”~에 관심을 갖는다“라는 표현입니다. 즉 유다는 이방여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창34:1)에서 디나가 그 땅의 딸을 (보러) 나갔더니 라고 하는 표현과 흡사합니다. 즉 영적인 사람이 육적인 눈이 되어서 결국 죄를 짓게 된 사건입니다.
결국 유다는 수아의 딸을 통해서 세아들을 낳습니다. 첫번째는 엘이고, 두번째는, 오난이고, 세번째는 셀라입니다. 특별히 셀라를 낳을 때는 *거십1거십 : 거십은 ”거짓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아둘람 근처의 도시 이름입니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첫째 아들 엘을 위하여 며느리를 데려와서 엘과 결혼시키려 했습니다. 그 며느리의 이름은 다말입니다. 아직 어린 엘에게 신부감을 주려고 한 이유는 그 당시에 가나안땅이 성적으로 매우 문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그것을 막고자 엘에게 일찍 장가들게 합니다. 그런데 장자 엘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죽이셨다 기록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이제 장자에게 준 며느리를 둘째 아들 ‘오난’이 잇도록 합니다. 이는 죽은 형제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고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기업 무를 자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다른 형제 특별히 오난이 해줘야 했습니다.
*이 법이 (신 25:5,6)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런데 9절에 보니, 오난이 그 씨가 자기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오난은 형수를 자기의 아내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보다 그리고 자기가 스스로 장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그도 죽이시니라
그래서 유다는 다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수절하라는 의미는 과부로 계속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1절에, 내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말하면서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하였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며느리 다말이 우리 집안에 불행을 가져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악한 행동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치신 이유는 사실 유다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유다가 이와 동일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냐면,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아둘람 사람과 가까이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서 떠났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뜻대로 할 때에 복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하는 것은 주님믿는다 말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며 주님 뜻대로 살아가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