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장 롯의 두려움과 죄의 결과 [Q&A3]

창세기 19장 롯의 두려움과 죄의 결과 [Q&A3]

[ 창세기 19장 강해설교를 통한 질문입니다. ]

Q. 질문

1) 롯이 처음에는 말씀대로 산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소알로 갔다가 심판 이후, (창19:30)에서 산에 올라가 굴에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변화라고 볼 수 있나요?

2) (창 19:20) 롯의 마음과 (창 19:26) 롯의 아내 마음이 같았지만 결말이 달랐는데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이 롯을 변화시키시는 은혜가 있다면 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3) 이후 모압과 암몬의 탄생은 롯이 용서함은 받았으나 이 땅에서 책임져야 하는 죄의 결과로 볼 수는 없을까요. 예를 들면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용서 받았지만 첫아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 처럼요.

A. 답변

1) 롯의 두려움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의 구원을 스스로 결정하는 롯을 발견합니다.

(새번역 19:20) 보십시오, 저기 작은 성이 하나 있습니다. 저 성이면 가까워서 피할 만합니다. 그러니, 그리로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주 작은 성이 아닙니까? 거기로 가면, 제 목숨이 안전할 것입니다.”

롯이 가진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적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의 모습은 롯처럼 굴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스스로 단절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권능에 압도하며 그 말씀에 ‘순종’으로만 반응하는 사람이죠. 아브라함처럼요. (마 4:19-20)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다시말해, 롯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부유한 소돔을 택했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 가까운 소알성을 택했고, 약탈자를 피하기 위해 산에 올라갔고, 마지막은 깊고 막다른 어두운 굴이었습니다. 따라서 롯이 가진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보다는 자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것에 더 가깝습니다.

# 성경속에서 동굴로 피했던 도피자들이 있습니다.

(삼상 24:1-3) 사울을 피해 도망자신세로 엔디게동굴에 피신해 들어갔던 다윗과 (왕상 19:13)에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굴로 도망간 엘리야를 들 수 있어요.

이 두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길을, 하나님이 몰아가셨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을 것이에요. 실제로 하나님은 도피성(민 35:27)을 통해서 부지로 살인자들을 구원해주시기도 하셨죠. 결국 두 사람은 몰아가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힘입고 주님의 온전한 사역자가 되었어요.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롯도 구원의 길로 몰아가셨지만 결국 그곳은 하나님안에서의 도피처가 아니었어요. 자신이 만든 도피처였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도피처는 항상 ‘평안’을 얻게 되어 있어요.

(요 14:26-27)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의 특성은 마음에 근심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영적 상태를 만나게 되죠.

결론 : 롯의 두려움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다.

 

2) 롯의 아내와 롯의 결말은 다른가?

룻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는데 사실 롯도 뒤를 돌아보므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모압과 암몬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결말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롯이 아직 자신과 같이 의인에 범주에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따라 소돔의 의인을 확인하시고자 천사 둘을 보내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롯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가셨습니다. 그러나 롯은 의롭게 되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구원의 손길에 대한 롯의 태도가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우리의 신앙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롯은 아브라함의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세상 사람에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3) 죄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을까요?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마르티아’라고 해서 하나님을 중심에 둔 표적에서 멀어진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지 않거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죄악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악함을(창 6:5) 보신 하나님께서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멀어진 거리를 좁혀주시기 위해서 오신 이유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우리가 짓는 죄의 결과 보다는 우리가 지을 죄 자체를 주목하시고, 하나님이 싫어하실 죄를 더이상 짓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구원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축복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이 전제된 말씀을 떠나면 더이상 구원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 죄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집사님의 예시를 살펴보면

먼저,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하는 죄를 저질렀지만 이 과정에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죄를 지적받았고 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 다윗은 빠르게 회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첫아들을 희생하시죠.

마치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하신 것처럼요.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한 아주 큰 희생을 치루시는데 그것이 바로 장자의 희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죄에 의한 결과’로 이해되는 것보다, 죄 지은 인간의 구원을 희망하는 “하나님의 용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모압과 암몬의 탄생을 하나님의 용서 차원에서 이해해보면, 롯이 지은 죄의 결과를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를 용서 받지 못한 한 인간에게서 그 죄가 계속 방치되게 하셨죠. 롯의 아내처럼요. 저주와 심판이 계속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노아의 아들 중 함이 받았던 저주와 심판과 같아요. 함이 받은 심판과 저주는 그의 아들 가나안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 특별히 우리를 향한 말씀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켜야하는 가를 분명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 9:27)

따라서 구원에 대한 손길을 거부한 대가는 롯이 앞으로 당할 저주와 심판으로 계속 될 것이고, 이것은 그의 후손들이 계속 짊어져야 될 결과가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구원 받을 위치가 되지 않습니다. (마 25:29-30)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씀과 같이 내어 쫓긴 상태가 된 것이죠.

그들이 구원 받으려면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을 구원자 하나님으로 여겼던 모압 출신 룻과 같은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만 개인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